문득 학창 시절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인 게 정말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원체 다독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두 달에 한 권씩 꾸준히 읽었는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책 읽을 시간이 줄어든 요즘, 그나마 독서를 이어나가고 있는 게 이때의 경험이 아닌가 싶다.
부모님이 워낙 전자기기에 보수적이셨고, 초등학교 때부터 낯을 가리는 성격에다 전학을 자주 가면서 자연스레 친구들과 나가 놀거나 게임하기보단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학교 도서관에서 폐관 시간까지 책을 읽고는 했다. 처음엔 학습만화부터 시작해서 판타지 소설, 문학, 고전, 에세이로 넘어갔던 게 기억이 난다. 어머니도 책을 좋아하시고 내가 책을 많이 읽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셔서, 책을 자주 사주시고는 했다. 내가 아홉 살 때에는 제목만 보시고 아홉 살 인생을 선물해주셨던 게 기억이 난다. 그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해가 안 가는 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 도저히 아홉 살이 읽는 책은 아니었다.
자기 계발서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도저히 손이 가질 않는다. 별 부실한 내용에 자기자랑만 죽 늘어놓은 책들을 혐오한다. 아마 인생 나 혼자 산다는 치기 어린 생각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를 가르치려는 책에 괜한 반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도저히 나 혼자는 힘든 상황이 온다면 도움을 구할지도.
중학교에 입학하곤 인천에 정착하고, 스마트폰이 생기고 게임을 시작하면서 그때와 같은 열정은 없었지만, 이때 들인 습관으로 책은 항상 도서관에서 한 권 씩 대출해 가방 속에 넣어두고 다녔다. 이때는 아마 소설만 읽었던 것 같다. 책의 종이 냄새를 맡는 습관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조금 변태 같지만 종이 내음이 주는 편안함이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 손잡고 자주 가던 비디오 / 책 대여점의 생각이 나서 좋아했던 것 같다. 세련된 인테리어에 새 책만 즐비한 서점보다는 도서관에서 사람 손 때가 탄 정감 가는 책들의 냄새가 좋았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공부하느라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라는 건 없었고 공부하기 싫어서 야자시간 내내 책을 읽기도 했다. 3시간 동안 집중해서 책 한 권을 끝내면 알찬 하루를 보냈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소설과 유명한 고전 / 철학을 읽기도 했는데 사실 이해도 안 되면서 지적 허영심에 취해 꾸역꾸역 완독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같잖아 보이지만 그래도 고전 문체에 익숙해지는데 조금은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렇다고 치자. 그동안 쌓아온 독서 경험이 국어과목에서 빛을 보기도 했다. 웬만한 비문학, 문학 지문은 틀리지 않았다.
지금은 읽고 싶은 책만 읽는다. 서점에서 아무거나 집어들어 한두 단락 보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려놓는다. 표지나 제목이 맘에 들면 아무 생각 없이 사기도 한다. 재밌는 책을 읽으면 그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정주행 하기도 한다. 대여해서 읽은 책이 맘에 들면 소장용으로 하나 사두기도 한다. 남들이 읽는 책, 필요한 책, 베스트셀러만 골라 읽으면 책을 꾸준히 읽을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사실 나의 독서 인생은 전반적으로 일종의 도피 수단이었다. 조금 도움은 됐을지언정 좋은 습관은 아니었다. 낯선 환경으로 전학을 가 적응하지 못해 도서관으로 도피하기도 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차마 양심상 놀지는 못하고 공부는 하기 싫어서 적당히 타협을 봐 책을 읽으며 현실도피를 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책을 읽을 때면 직면한 걱정거리들로부터 조금 벗어나는 기분이 든다. 시험기간에 공부는 안 하고 한가롭게 소설을 읽고 있으면 길티 플레져마저 느껴진다. 나의 독서는 지적 탐구심이라던가 하는 고상한 목적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가끔 의외로 책을 많이 읽는다며 칭찬하거나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분은 좋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칭찬받을 일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며 조금 창피하기도 하다. 고등학생 때 가졌던 지적 허영심이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고쳐야 하는데.
어쩌면 나도 할 일이 많아지고 책임질게 많아져 더 이상 도피하지 못하고 개인적으로 책을 못 읽게 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그러는 것 처럼 자식이 책 읽는 모습을 보며 나도 예전엔 책 정말 좋아했다며 옛날이야기를 하게 될까. 상상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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