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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서평과 독후감 그 사이 어딘가

미켈 데 세르반데스 - 돈키호테 1

by Ho.virus 2021. 5. 14.

돈키호테 하면 풍차로 돌격하는 당나귀 탄 기사가 먼저 떠올랐다. 어렸을 적 읽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마 지루해서 금방 덮어버렸던 것 같다.

이제 와서 뜬금없이 돈키호테를 다시 읽은 이유는 오만과 편견 다음으로 읽어볼 고전 문학을 찾아보던 중 2002년 노벨 연구소에서 작가들 사이에서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하고 중심적인 작품" 설문 중에서 과반수 이상으로 1등 꼽혔다는 것을 보고 흥미가 생겨 주문했다. 다른 명작들을 제치고 1위를 한 이유가 궁금했다. 찾아보니 다양한 관점으로 볼 수 있어 해석 역시 다양한데, 이 점에서 조금 안도했다. 해석의 갈래가 다양하다니 내가 오독으로 정론과 다른 해석을 내놓을 부담감이 덜하니까 ㅋㅋㅋㅋ

온라인 상으로 보기엔 책 디자인도 맘에 들고, 평들이 좋길래 빨리 읽고 싶어 기대했는데, 주문한 책을 받고 좀 놀랐다. 어릴 적 읽었던 돈키호테를 생각했는데 웬걸, 1권만 750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책이 왔다. 이 정도 두께의 문학 소설은 오랜만이라 방대한 분량에 조금 압박감을 느꼈다. 금방은 못 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책을 들고 읽는 것도 손목이 아파 힘들었다..

열린책들 / 돈키호테 1권 from yes24

 

작가 미겔 데 세르반데스는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인생사가 너무 길어 이 책을 보는데 도움이 될만한 부분들을 추려보자면, 군에 입대후 레판토 해전에 참전해 왼손을 잃고, 5년간 포로생활을 하다 극적으로 자유를 찾는다. 그 후 억울하게 옥살이를 7개월 정도 하며 돈키호테를 구상하고, 58세의 나이로 돈키호테를 출판한다. 이 돈키호테는 큰 성공을 거두지만, 수익은 출판사가 가져가고 본인은 별 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다. 10년 뒤 후편을 발표하고 세르반데스는 이듬해 세상을 떠난다.

사실 돈키호테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끝까지 읽어본 사람 역시 별로 없을것이다. 아마 방대한 분량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다른 고전들이 으레 그렇듯 조금 난해하고 긴 문장들과 지금 시대와 다른 상식에 괴리감을 느껴 읽기 힘들 수도 있다. 돈키호테에서는 작가의 비꼬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 당시는 빵 터지거나 센스 있는 돌려 까기였겠지만, 내가 이해하기엔 좀 힘들었다. 아마 각주가 아니었으면 이게 비꼰 건지도 몰랐을 듯.

그래도 다행히 초반부(소네트...)를 넘어가면 이해할만한 농담들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읽기 어렵지 않았다. 책의 분위기가 너무 무겁지않고 전체적으로 장난스러운 분위기이고, 이미 고전 문학/비문학 작품도 몇 번 읽어봐서 이 어질어질한 문장에도 어느 정도 내성이 생겼다.

책의 주인공은 돈키호테 데 라만차와 산초 판사이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을 읽다 미쳐 편력기사 (방랑기사쯤으로 이해하면 될듯) 로서 여행을 나서는 인물이고, 산초 판사는 순수한 인물로서 섬을 하나 주겠다는 돈키호테의 허풍에 넘어가 가정을 뒤로하고 종자로서 길을 나서는 농부이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 자유, 정의를 위해서라면 타협 따윈 없는 광기 어린 캐릭터로 그려진다. 말로 듣기엔 좋지만, 이 기사도가 자신의 광기 어린 환상에서 기인된다는 것이 문제...

풍차를 거인으로 여기고 말리는 산초를 무시하고 돌진한다던가,

죄수로서 끌려가는 사람들에게 마땅한 자유를 줘야한다며 죄수 후 송인 들을 공격한다던가,

양 떼와 양치기들을 군대로 생각해 1인 돌격을 감행하기도 하고,

지나가던 이발사의 놋쇠 대야를 전설의 투구로 생각해 공격한 후 전리품으로 챙긴다던가...

이처럼 당대의 기사도 소설을 비꼬면서 주인공 돈키호테를 통해 유머스럽게 진행된다. 현대에 자주 등장하는 클리셰 비틀기를 이용한 개그 작품들을 생각하면 분위기를 상상하기가 편하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단순히 기사도 소설을 비판하는 내용만 담고 있었다면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기사도 소설을 비꼬고 비판하긴 했지만 소설에 담긴 가치까지 폄하하지 않았다. 세르반데스가 돈키호테의 입을 빌려 부르짖는 정의와 자유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다른 소설처럼 이런 가치를 거창하게 포장하거나 치장하지 않았다.

돈키호테는 우리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별난 사람, 모난 돌과 유사하다. 자신이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고, 곤란한 사람을 도와주려는 돈키호테에게 사람들은 조소를 던지고 짓궂은 장난을 친다. 그의 종자인 산초도 비록 순진하여 주인을 존경하긴 하지만 그의 정의에 공감하여 따르는 게 아니라 섬을 하나 주겠다는 허풍에 넘어갔다.

물론 돈키호테가 완벽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의도치 않게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행복을 찾아주기도 하고, 입바른 소리를 할 줄 아는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노예를 도와주다 더 큰 매질을 부르기도 했고, 죄 없는 사람 여럿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문제는 옳고 그름이 아니다. 사람들은 돈키호테의 정의를 비판하고 설득하거나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기보다는 그저 우습게 여기고 놀리기 바쁠 뿐이다.

진지하고 건설적인 담론이 이루어지지않고 서로를 헐뜯기 바쁜 사회. 여기서 정의란 단어가 가지는 보잘것없는 위상을 세르반데스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정의를 추구하는 일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세련되고 영광되기보다는 좀 더 초라하고 고된 법이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돈키호테처럼 재지않고 달려들 수 있을까? 혹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 폄하하며 뒤에서 조소하진 않을까?

세르반데스와 돈키호테가 외치던 정의는 자유였다. 나는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나의 정의는 찾을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아마 미쳐버렸던건 돈키호테뿐만 아니라 세상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도 거대한 풍차를 향해 돌격할 수 있는 열정과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