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서거 60주년 에디션이라는, 독특한 디자인의 책이 눈길을 끌어 읽어보았다.
카뮈의 문학작품 대표작 이방인과 페스트를 엮은 책인데, 이방인만 읽었다.
다 읽고 나서 감명 깊어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시지프 신화를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름 해석도 해보고 이해하려 노력했는데 잘 안된 것 같다. 시지프 신화를 읽고 다시 읽어야겠다.
무미건조한 느낌의 주인공인 뫼르소는 칼든 아랍인 사내를 살해하고, 재판을 받게 된다.
뫼르소의 삶은 언듯 보면 굉장히 낯설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잘 모르겠다.'
란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주인공의 성질을 잘 나타낸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다음날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연인을 폭행하려는 남성을 도와주며 자신을 사랑한다는 연인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대답하는 등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듯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나로 하여금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게 하고, 뫼르소를 나와 다른 존재인 이방인으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것 때문에 제목이 이방인인가 싶었다.
하지만 뫼르소는 우리에게 이방인이 아니었다. 소설 전체가 일종의 비유이다. 카뮈는 소설 내내 모든 사건이 자신과 관계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재판이 터무니없는 방향으로 흘러가 자신을 공격해도, 별거 아닐 것이라는 타인의 말을 믿고 단지 재판 과정을 주시할 뿐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은 하지 않는다. 결국 뫼르소는 사형 판결을 받고, 안식을 권하는 종교인을 거부하며 그 끝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낸다.
뫼르소는 자신의 인생을 방관한다. 부모님의 죽음, 연인의 사랑, 타인의 불행을 남의 것처럼 여기던 그는 곧 시시각각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남의 것처럼 여긴다. 자신의 인생을 남의 것처럼 여기는 것과 같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잘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흔한 주제지만 어떻게 죽을것인가는 어딘가 불편하고 친숙하지 않다. 끝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아무리 훌륭한 인생을 살았어도, 아무리 못난 인생을 살았어도. 어떤 면에서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것인가 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정답인 것만 같다.
나는 과연 뫼르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인생을 그저 방관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인생에 있어 중요한 것들을 무시하지 않았고, 보잘것없는 것에 온 힘을 다해 매달려있지 았았노라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을까? 뫼르소는 자신에게 있어서 이방인이었다. 나도 나에게 이방인 일지 모른다. 뫼르소가 죽음을 직면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낸 것처럼, 나는 당장 내일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죽음을 직면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서평보다는 독후감을 생각하면서 썼다. 책을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서평을 쓰지는 못한다...
시지프 신화를 주문했는데 아마 지금 읽고 있는 돈키호테를 다 읽고 나서야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이 생각보다 많아 다 읽을 수 있을까 했는데 재미있어서 금방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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